앙겔라 메르켈의 일곱 가지 유산!
제20대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특별히 이번 선거가 남긴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대한민국이 분열과 혐오를 극복하고 통합과 연대의 길로 성장해 가길 소망합니다. 또한 전 세계인들에게 존경받는 독일 전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걸어갔던 길을 되돌아 보길 바랍니다. 조용하고 신중하면서도 유연하고 강인한 스타일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한 그녀의 일곱 가지 유산에 대해 정리했습니다.
- 조용·신중하면서도 유연·강인한 ‘메르켈스타일’로 유로존 재정난 등 극복
- 불안정한 시대에 딱 맞는 총리 평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67)는 2021년 9월 26일 총선을 끝으로 16년 집권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정치 인생으로 보면 31년 만의 퇴장입니다. 선거에 스스로 출마하지 않음으로써 메르켈 총리는 ‘독일 역사상 자발적으로 퇴임하는 첫 번째 총리’가 됐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기록한 ‘최초’라는 타이틀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최초의 여성 총리’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 ‘최연소 독일 총리’ ‘최장기간 재직 총리(헬무트 콜 전 총리와 동일)’ 등입니다.
16년간의 장기 집권이었지 퇴임을 앞둔 시점에서도 메르켈 총리의 인기는 여전했습니레임덕이나 지지율 하락 같은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엄마의 리더십’으로 독일 국민들과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16년 세월이 결코 순탄했던 건 아닙었습니다. 오히려 ‘위기의 총리’라고 불릴 정도로 집권 내내 수많은 위기를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메르켈 총리가 맞닥뜨렸던 7가지 위기를 통해 그녀의 16년 총리 인생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메르켈른(merkeln)’ 즉, ‘메르켈스럽다’라는 말은 조용하고 신중하면서도 유연함과 강인함을 겸비한 메르켈 스타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파 연정을 이끌면서도 좌우 가리지 않고 모든 의견을 폭넓게 수용했던 메르켈은 재임 기간 동안 특별히 튀거나 논란이 될 만한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자 출신으로 ‘동독 과학아카데미’에 몸담았던 메르켈이 정치에 뛰어든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이었습니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성향이 강했던 메르켈은 금세 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에 입당한 메르켈은 1990년 연방하원의원을 거쳐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자연보호핵안전부 장관을 역임했고, 1998년에는 CDU 사무총장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2000년 CDU 대표로 선출된 후 2005년 처음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메르켈의 16년 장기 집권을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총선에서 기독교민주연합(CDU)과 기독교사회연합(CSU)은 사회민주당(SPD)보다 겨우 1%포인트 높은 35.2%를 얻어 가까스로 승리했었숩나다.
그러나 보란듯이 메르켈은 이듬해 미국 시사주간 ‘타임’이 꼽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고, 위기 때마다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입지를 굳혀 나갔습니다. 이와 관련,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메르켈 시대는 보이지 않는 위협의 시대였다. 2008년 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코로나19 대유행이 그랬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불확실함과 두려움에 휩싸여 공포에 떨기 마련입니다. 가령 일자리를 잃거나 전재산을 날리거나, 혹은 질병에 걸려 건강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위기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겁을 먹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메르켈은 불안정한 시대를 이끄는 총리로서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슈피겔’은 메르켈의 임무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를 위한 해답을 찾는 데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메르켈이 그 임무를 얼마나 잘 완수했는지는 몇 년, 심지어 몇십 년 동안은 확실히 알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역사가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현 상황에서 도움이 될만한 메르켈이 남긴 일곱 가지 유산에 대해 슈피겔이 정리한 기사를 정리했습니다.
1. 금융위기
2008년 미국 뉴욕의 리먼 브라더스 투자은행이 파산하자 전세계 금융시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신용등급이 낮은 ‘서브프라임’ 대출의 채무 불이행 증가로 전세계 대형 금융기관들이 줄도산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은행들은 하나둘 위기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고, 주가는 폭락했으며, 언론에서는 연일 불길한 소식들이 쏟아졌다.
메르켈은 위기 초반에는 막막한 듯 보였다. 경제학자 출신이 아니었던 그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충격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기민하게 움직였다. 금융 전문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을 해나갔다.
9월 28일 늦은 밤, 메르켈은 당시 도이체방크 은행장이었던 요제프 아커만과 담판을 벌였다. 밤샘 협상 끝에 은행이 85억 유로(약 11조 원)를, 그리고 정부가 265억 유로(약 36조 원)를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은행마다 예금을 인출하려는 행렬이 줄을 이었고, 급기야 몇몇 은행에서는 고액권 지폐가 동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10월 5일 메르켈은 피어 슈타인브뤼크 재무장관과 함께 대국민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은행에 돈을 맡긴 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예금은 안전합니다”고 안심시켰으며, 곧이어 은행을 상대로 한 4800억 유로(약 660조 원)의 대규모 구제금융이 독일 의회를 통해 신속히 통과되었다.
그런 다음 메르켈 정부는 경제에 미칠 충격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먼저 새 차 구입을 지원하는 보상프로그램인 독일의 유명한 ‘노후차량 보조금 지급 정책’을 도입했고, 직장에서 임시 해고를 당한 근로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도 실시했다. 덕분에 독일은 금융 위기 때도 국내총생산은 5.7% 감소했지만, 실업률은 증가하지 않는 기적을 이뤄냈다.
당시 이 성공은 뛰어난 위기 관리자로서의 메르켈의 명성을 확립시키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반대로 개혁의 고삐는 늦출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들이 이미 충분히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고 생각했던 메르켈은 개혁을 통해 국민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복지를 확대하고 육아 때문에 잠시 일터를 떠난 여성들을 위한 연금 제도를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로 인해 일터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균형이 이뤄졌고, 결과적으로 이는 사회 전체에 매우 유익하게 작용했다.
‘슈피겔’은 메르켈이 금융위기를 재정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관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민들에게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이해시키는 데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독일인들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진 은행을 왜 정부가 나서서 구제해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오히려 독일인들이 정치에 대해 더욱 불신하게 된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2. 유로존 경제위기
“유로화가 실패하면, 유럽도 실패한다.”
2009년 말, 유로존의 재정 위기가 불거지자 메르켈은 유로화를 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 후에는 유로존 국가들을 상대로 강력한 구조개혁과 긴축정책을 실시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에 반대하는 그리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메르켈을 히틀러에 비유했고, 메르켈이 가는 곳마다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메르켈의 결정이 옳았다. 뼈를 깎는 개혁을 통해 독일과 유로존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메르켈은 스스로 이 성과를 총리로서 이룬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었다.
메르켈이 이렇게 불도저처럼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갖고 있던 유럽연합(EU)을 위한 전략적 목표 때문이었다. 메르켈은 유로존을 통해 구대륙의 동맹을 굳건히 하고, 강화하고,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미국, 중국과 함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제3세력으로 자리를 잡는 한편, 이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독일의 지위가 확고히 자리 잡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후 유로존의 상황은 메르켈이 구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현재 영국은 더 이상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며, 헝가리와 폴란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공동방위정책과 같은 중요한 프로젝트들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에 대해 ‘슈피겔’은 “결과적으로 메르켈은 유럽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이 문제는 그가 퇴임한 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3. 푸틴과의 갈등
16년 내내 메르켈의 영원한 위협 상대이자 적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또한 메르켈의 골칫거리였지만 푸틴만큼 강력하거나 위협적이진 않았다. 적대적인 관계였던 메르켈과 푸틴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지어 푸틴은 메르켈이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반려견인 래브라도를 양자 회담에 동석시켰고, 메르켈은 이에 대해 “러시아 대통령은 내가 그의 반려견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에 반려견을 데리고 나왔다”며 불편함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실 푸틴과의 관계는 메르켈의 국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메르켈은 종종 서방 국가를 대표해서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는 인물로 인식됐었다. 이유인즉슨, 동독 출신인 까닭에 동구권 문화를 잘 알고 있었고 러시아어도 유창한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임기 초기 메르켈은 러시아를 상대로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싸웠다. 가령 푸틴에게는 반정부 비평가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의 살해 사건을 해결하라고 촉구했고, 중국에 의해 잔인하게 탄압당하고 있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기도 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메르켈 총리의 목표였고, 실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푸틴은 여기에 감동받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는 메르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티어가르텐 공원에서 그루지야 국적 인사를 포함한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독살하거나 총살했다.
‘슈피겔’은 메르켈이 푸틴을 포함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긴 했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서방세계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메르켈은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러시아를 향해 결코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미사일을 제공하는 것 역시 반대했다.
또한 메르켈은 이상주의자이긴 했지만, 국가적 이윤을 추구해야 할 경우에는 사업가로 전환하기도 했다. 일례로 미국이 적극 반대하는 등 대외적으로 비난이 빗발쳤는데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러시아에서 독일로 향하는 '노르트 스트림 2' 가스관을 건설하는 계획을 고집했다. 이런 까닭에 러시아의 반정부 정치 비평가인 알렉세이 나발니의 독극물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권 문제가 다시 대두됐을 때도 메르켈은 러시아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펼치면서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4. 난민 문제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2년이 지난 2015년, 메르켈의 대중적 지지도는 여전히 높았다. 당내에서도 그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메르켈 임기 기간 중 가장 큰 위기였던 난민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당시 유럽에서는 난민 수용 문제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밀려오는 난민들 수가 100만 명이 넘어가자 유럽 각국은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시를 가리켜 “아마도 메르켈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르켈은 많은 독일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난민 수용 정책을 펼쳤다. 난민 센터를 방문했을 당시 메르켈은 독일 국민들을 향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확신시켰으며, 실제 9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슈피겔’은 “메르켈의 타고난 기질, 자유에 대한 사랑, 장벽에 대한 거부감, 목사였던 아버지를 통해 물려받은 기독교적 배경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해 ‘타임’은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고, 메르켈은 서방세계의 등불이자 민주주의 가치를 상징하는 선구자가 됐다.
물론 치러야 할 대가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메르켈의 포용 정책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의 지지율은 처음으로 50% 아래로 떨어졌으며, 유럽은 분열됐다. 독일 곳곳에서는 난민들에 대한 분노, 인종차별, 증오가 촉발됐으며, 급진적 우파인 독일대안당(AfD)은 하루가 다르게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독일에 들어온 난민들 가운데 일부가 살인, 성폭행 등 문제를 일으키면서 반난민 정서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메르켈은 정책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메르켈은 “난민 유입 수를 줄이겠다”고 선언하면서 한발 뒤로 물러났다.
5. 도널드 트럼프
재임 기간 동안 네 명의 미국 대통령과 함께했지만 메르켈은 그때마다 미국과의 동맹을 견고히 다졌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늘 껄끄럽고 불편했다.
트럼프는 메르켈과 정반대 성향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메르켈은 트럼프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메르켈은 트럼프의 비이성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스타일을 싫어했다. 메르켈이 한동안 미국보다 중국과 더 많은 교류를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슈피겔'은 분석했다.
실제 트럼프 정부 시절 독일과 중국의 친밀도는 예전에 비해 증가했었다. 메르켈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은 비록 공산당이 통치하는 국가이긴 하지만 결코 비이성적이진 않았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메르켈 총리에게는 차라리 이쪽이 더 나았다.
6. 기후 위기
“미래 세대의 생명이 달려있는 토대가 위태롭다. 우리 모두는 당장 행동해야 한다.”
기후변화 문제에 있어서 메르켈은 적극적이었다. 2007년 3월, EU 회원국들에게 탄소 배출량 감축을 추진하도록 촉구했는가 하면, 그해 6월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만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게는 기후 정책을 유엔의 손에 맡기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8월에는 그린란드를 방문해서 녹고 있는 빙하를 배경으로 빨간 재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이런 잰걸음은 효과가 있었다. 많은 독일인들이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는 총리가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하지만 흥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09년이 되자 메르켈은 더 이상 기후변화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금융위기로 인해 독일의 경제가 침체되자 메르켈은 독일 국민들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당장 발등의 불인 재선을 위해서라도 기후 문제에 관심을 보일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 메르켈은 독일 자동차 산업을 위해 싸우는 최고의 로비스트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재임 기간 탓일까. 메르켈은 궁극적으로는 기후 문제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19년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미래 세대’인 젊은 학생들이 스웨덴의 환경운동 활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기후 정책에 항의하기 시작하면서 기후 문제는 다시 한번 세계의 중심 이슈가 됐다.
그 결과 유럽연합과 독일은 앞다퉈 새로운 기후 변화 정책을 쏟아냈다. 그리고 임기 말인 올해에는 폭우로 인한 대홍수가 발생해 서쪽의 마을들이 폐허가 되자 메르켈은 다시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임기 말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책은 메르켈보다는 후임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됐다.
7. 코로나19 팬데믹
“이것은 심각하다. 제발 심각하게 받아들이라.”
최악의 위기는 임기 말에 찾아왔다. 바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이다. 다른 많은 나라들의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메르켈도 처음에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메르켈은 평소보다 더 활발히 소통했으며, 관료적인 태도를 버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에 대해 “메르켈은 분명하고 솔직한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일부 세계 지도자들이 결정을 못 내린 채 망설이고 있을 때, 과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이런 메르켈의 지도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덕분에 대유행 초기에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비교적 순탄하게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정복하기 어려운 과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메르켈의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메르켈은 독일 주지사들이 코로나19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도록 설득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주지사들은 더 이상 메르켈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으며, 급기야 2020년 가을 메르켈 체제는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독일은 코로나19 대유행에서 그리 나쁜 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슈피겔’은 메르켈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독일의 전반적인 정치 시스템, 기존의 사회구조, 국민 태도 등 이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실 메르켈 시대 동안 독일은 대체로 안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숱한 위기와 재난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번영을 이뤘으며, 독일인들 역시 비교적 좋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메르켈은 전임자들과 크게 다른 한 가지 면이 있었다. 그는 결코 권력에 취하지 않았으며, 허영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의 모습은 조금은 늙은 외모를 제외하고는 2005년 처음 취임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메르켈 본인은 자신이 남긴 정치적 유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늘 대답하길 거부해왔다. 역사적 평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지난 2019년 독일 북부의 작은 항구 도시인 슈트랄준트를 방문했을 당시 메르켈은 “50년 후 역사책 속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묘사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간단하게 이렇게 답했다.
“그녀는 노력했다(She tried).” 이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메르켈은 만족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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